무엇을 해야 남에게 도움을 주면서 나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고 민하는 분이 있습니다.
“제가 세상을 보는 눈이 너무 어두워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해봐도 모두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모두들 진리를 말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일 뿐 명확한 답을 내리고 있지 않습니다. 저도 그중 하나를 믿고 싶고 그래서 힘을 내고 싶지만 믿기지가 않습니다. 주위에서는 허무주의자라고 말하더군요. 제가 할 수있는 일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밖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글로 읽으면 ‘요즘 젊은이답지 않게 거국적으로 좋은 생각을한다. ‘라고 보는 사람도있을 겁니다.하지만 가만히 들어 보면 이 사람은 욕심이 너무 많아요. 나도 좀 잘 살고 남 한테 좋은 일도 하겠다는 생각부터 욕심이에요. 어떤 사람이 제게 찾아와서 말합니다.
“스님, 결혼도하고 싶은데, 한편으로는 출가해서 스님처럼 살고도 싶어요.”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떻게 젊은 사람이 이런 마음을 먹었나?’ 하면서 기특해할 일입니까? 아닙니다. ‘이 사람은 욕심 덩어리로구나. ‘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그 이유는 뭘까요? 출가한 스님이나 신부님처럼 종교에 귀의해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도 받고 싶고, 다른 한편으로는 결혼해서 아기자기한 쾌락과 행복도 누리고 싶은 마음이 공존하는 겁니다. 놀부가 두 손에 떡을 들듯이 양손에 존경과 쾌락 두 개를 움켜쥔 형상이죠. 그래서 갸륵한 마음이 발심한 것이 아니라 욕심이라고 말한 겁니다.
질문 한 양반도 뭔가 듣기에는 거창하고 좋은 말 같지만 사실은 욕심이 너무 많아요. 욕심이 많으니까 눈앞에 뭔가가 가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죠. 우리가 자주하는 말 중에 “욕심에 눈이 어두워 00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 하나 눈과 관련된 말 중에 화가 너무 날 때 “눈에 보이는 게 없다. ” 라고 말합니다. 눈이 어둡다 혹은 눈에 뵈는 게 없다는 말은 모두 ‘어리 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화가 나면 사람이 어리석어지고, 욕심이 많아도 어리석어집니다. 평소 같으면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저지르지 않을 일을 살짝 욕심부리면 과용하고 판단도 흐리게 되죠. 눈에 뵈는 게 없다는 것은 그래서 오히려 일을 그르친다는 뜻이에요.
지금 인생의 갈피를 못 잡고 할 수있는 일이라고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도 자신의 욕심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 먼저 욕심을 버려야 해요. 그렇지만 ‘욕심’이 버린다고 해서 버려지는 것은 아니죠 .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세요. 지난여름 장마에 농사를 망쳐서 북한에 굶어 죽은 사람이 많다고 해도 내가 모르면 괴로움이 됩니까. 안 됩니까? 구제역 때문에 소를 수천 마리 생매장했다는데 그 시간에 나는 인도나 히말라야를 여행하다가 돌아왔어요. 그러면 소를 생매장한 사건이 나에게 괴로움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됩니다. 나한테 괴로움이되는 건 실제가 무엇이냐가 아니고 내 마음이 어떤가의 문제예요. 예를 들어 밤에 비단 이불을 덮고 따뜻하고 편안한 잠자리에서 자다가도 강도에게 쫓기는 꿈을 꾸면 괴로워요, 안 괴로워요?
주위에 아무 일 안 생겨도 마음에서 그 환영에 사로잡히면 괴로움이 생기고, 주위에서 난리가 일어나도 내 마음에 아무런 작용이 안 일 어나면 괴롭지 않습니다. 그러니 나의 괴로움은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거지, 바깥 문제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착각을 하고 있어요. 남편이 술 마시고 늦게 들어와서, 바람을 피워서, 아내가 내 부모님 이랑 사이가 안 좋아서, 자식이 공부를 안 해서, 대학까지 공부시켜 놨더니 다 큰 자식이 취업도 못 하고 집에있어서, 직장을 얻지 못해서……. 내 마음이 괴로운 건 이것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닙니다. 내가 지금 괴로운 이유는 그것 때문이 아니에요. 내 괴로움은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어떤 문제 때문에 괴롭다고 할 때 외부의 사람이나 사물을 탓해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괴로움의 원인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마음을 닦고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원효대사가 하신 말씀을 떠올려볼까요? 원효대사가 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가던 갈에 동굴에서 잠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한밤중에 묵이 말라 일어나 어둠 속에 더듬었더니 손끝에 물이 담긴 그릇이 닿았죠. 시원하게 목을 축이고 다시 잠을 청했습니다. 다음 날 일어나 보니 간밤에 마신 물은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이었습니다. 원효사는 그곳에서 큰 깨달음을 얻고 말합니다.
(심생즉종종법생) 마음이 일어나니 온갖 법이
일어나고.
(심멸즉감분불이) 마음이 멸하니 감실과 무덤
이 다르지 않네.
(삼계유심만법유식) 삼계가 오직 마음일 뿐
이요, 만 가지 현상이 오로지 식일 뿐이네.
(심외무법호용별구) 마음 밖에 현상이 없거
늘 어찌 따로 구하겠는가.
조금 쉽게 풀자면 ‘한 생각이 일어나니 갖가지 법이 일어나고, 한 생각이 사라진다. 삼계가 허위이니 오직 마음 만이 짓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또 다른 말로 예로부터 “일체는 유심소조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때’일체 ‘는 온갖’번뇌 ‘라는 뜻이에요.’돌멩이가 내 마음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괴로움과 번뇌는 다 내 마음이 일으킨 것이다. 일체의 분별은 내 마음이 짓는 바다.’ 이런 뜻이에요. 모든 것이 마음에서 일어나요. 우리가 ‘전도몽상이다. ‘착각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괴로움을 두고 하는 말이죠.
그런데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지금 바깥에서 누군가 나를 괴롭힌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마치 꿈속에서 강도에게 쫓기던 사람이 ‘사람 살려!’라고 아우성치면서 지금 느끼는 괴로움이 강도 때문에 생긴 거라고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하지만 옆에서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이 보면 쫓아오는 강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오히려 ‘잠은 안 자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라고 하겠죠. 자는 사람은 죽을 듯이 괴로워하며 사람 살리라고 아우성을 치지 만 깨어 있는 사람은 잠꼬대, 헛소리를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오늘 괴롭다 고 아우 싱 치는 것은 다 잠꼬대와 같습니다. 호랑이한테 쫓기는 꿈이든 강도한테 쫓기는 꿈이든 벼랑 끝에서 떨어지는 꿈이든 어떤 꿈을 꾸든지 눈만 뜨고 꿈에서 깨어나면 현실에서는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일체 괴로움이란 눈만 뜨면, 즉 깨닫기만 하면 그냥 다 없어져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깨달음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 깨달음은 마치 악 몽에서 깨어나 같습니다. 눈을 꽉 감아 안 보이다가 눈을 떠보면 본래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괴로움이 있었는데 그 괴로움이 없어지는 게 아니고 본래 괴로울 일이 없었다는 겁니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혼자 환영에 휩싸여서 괴로워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금강경>에도 그런 환영, 상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이 나옵니다.
“일체 유위법은 여몽환 포영”이 그것입니다. 모든 것이 꿈같고 환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아침 이슬 같고 번갯불 같다는 말입니다. 풀이하면 착각이다. 이런 말이에요. 그래서 이게 꿈인 줄 알면 금방 눈 뜨면 끝인데 꿈인 줄 모르면 밤새도록 계속 도망 다닌다는 것이죠.
이제 두 번째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북한의 어린 아이들이 굶어 죽는데도 나는 몰랐다고 가정해보죠. 모르면 나한테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그렇다고 굶어 죽는 아이들이 죽지 않습니까? 내가 몰라도 굶어 죽는 건 죽어요. 그 문제는 내가 눈감는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 문제는 내가 스스로 뜨면 해결되지만 세상에서 굶어 죽고 고통받는 중생을 해결하려면 내가 눈을 뜬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눈감고 안 본제가 사라지거나 해결되지 않습니다.
내 괴로움은 남과 논의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라 내가 깨쳐야 해결이 되고, 고통받는 이웃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내가 피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에요. 내가 피하면 내 속에서 없어진 것이지,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어요. 외면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방법은 우리가 그것을 알아서 구체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밥이 없어 굶는 아이들에게는 밥을 먹여야 살고, 병든 아이들에게는 약을 줘야 살 수 있습니다. 학교도 못 다니고 배울 수 없는 아이들에게는 공부할 수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해결되지요. 우리가 이런 문제에 대해 외면하지 않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자비심이라고 말합니다.
앞에서 말한 내 고민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내 해달은 지혜의 눈을뜨면 해결이 되고, 불쌍한 중생들을 구제하는 것은 내가 불쌍히 여기고 연민하는 마음이 있어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연민의 마음에는 종교나 피부색, 제도나 이념이 다르다는 조건이 의미가 없습니다. 북한의 아이들이든 아프가니스탄의 아이들이든 국가도 의미가 없어요.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안타까워하고 슬퍼할 뿐입니다.
일본과 우리는 과거 역사적으로 아픔이 있었고, 지금도 독도 문제 등으로 분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본 동북부에서 지진이 일어 나고 쓰나미가 발생해 마을이 산산조각 부서지듯 사라진 사건을 보면 마음이 아프죠. 정치적으로 밉다 고 ‘에잇, 그거 천벌받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일본이 밉더라도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없는 엄청난 자연재해 앞에서 재산도 잃고 가족도 잃어버린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면 마음 아프고 안타까워하면서 작은 돈이라도 성금을 내고 돕고 싶어합니다. 이런 마음을 자비심이라고 합니다.
불교의 핵심은 시혜와 자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지혜와 자비를 구족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지혜는 자기를 해탈시키고 자신의 행복을 만끽하는 것이고, 자버는 남의 고통을 덜 어주는 구체적인 실천 행위입니다. 불교 신자를 불자라고하는데, 불자 란 아버지인 부처님을 따라 지혜와 자비를 갖춘 거룩한 인물이 되고자 노력하는 존재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법의 이치를 확연히 꿰뚫어 서 자기를 해탈시키는 지혜도 없고, 이웃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느끼고 해결하는 자비의 마음이나 행위도 없 습니다. 왜 이렇게 우리가 지혜도 자비도 없을까요? 세 가지에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탐욕입니다. 욕심에 눈이 멀어 어두워 졌어요. 두 번째는 진애 때문입니다. 내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성내는 것이죠. 일본에서 일어난 지진을 두고 일부에서 천벌을 받았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나도 모르게 화를 내고 안 받아주니까 미운 마음에 벌 받았다는 말까지 나오게 된 것이죠. 마 지막으로 세 번째는 진리에 어두운 무지입니다. 이 세 가지 원인이 우리의 자기 해탈도 막고 중생 구제도 막고 있습니다.
“나는 앞으로 대통령이 될 거야’.”라고 어린아이가 말합니다. 이럴 때 대통령이 되겠다는 생각은 욕심이 아닙니다. 욕심이란 상호 모순 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를 말합니다. 내 문제도 해결이 안 되면서 남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고 싶어하면 그것은 자기 욕심에서하는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처음에 고민을 털어놓은 이 사람은 남에게 조금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겠다고 말했는데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다른 사람에게 좋은 평가를 듣고 싶다는 말이에요.
불교에서는 큰 상 작은 상 따지지 말고 아무런 대가없는 보시를 해 라, 상을 바라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그럴 때 무주상보시의 공덕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이죠. 바람이 없는 보시를 하면 삼천 대천세계에 칠보로 가득히 채워서 보시하는 것보다 더 크다고 말합니다. 남을 도와 줄 때 거기에 대한 칭찬을 받고 싶거나 보상을 받고 싶은 마음 없이 돕는다면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 먼저 내 문제를 살펴볼 수 있는 지혜의 눈을 떠야 합니다. 나에게 지금 무슨 문제가 있는지 꿈에서 깨어나 듯 내면의 문제들을 살피고 해결 방법을 찾아야 해요. 그렇게 자기 해탈을 이루고 나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 되는 일을 실천할 수 있지요. 누구의 칭찬을 바라고하는 일이 아니라 그야말로 순수한 의미의 보시를 행동으로 옮길 수있는 거예요.
영어도, 상식도, 제 2 외국어 공부도 좋습니다. 단, 남들 따라하는 억지 공부는 하지 마세요. 입시 때문에 취업 때문에 하는 공부가 아니라 나 스스로 주인이 되어 내가 하고 싶고 필요해서 하는 공부가 내 것입니다.
_ Trích: Quyển 방황해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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